우울한 감성으로 끝났다. 5화의 감정선은 6화의 시작으로 이어진다. 스물 아홉의 지은탁과 마주하고 자신이 사라졌음을 깨달은. (혼자 잘못 이해한 모습일 수 있겠지만) 도깨비는 집으로 돌아와 지은탁에게 검을 뽑아달라 요청한다. 그간 복잡했던 감정은 이 대사로 표현된다.
“
이제 그만 하고 싶어.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생각.
”
지은탁이 삶에 들어오며 행복을 느끼게 되고 그것이 첫사랑임을 알게 되는 순간 삶에 대한 아쉬움과 애착이 커지는 것이 두려워지는 도깨비는 자신의 미래를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고 싶어 지은탁에게 검을 뽑아달라고 부탁한다.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행복한 미래를 꿈꾸려는 자신을 꿈이라는 상상에서 빼내기 위해서. 그러면서 자신이 찔린 검으로부터 얼마나 불행한 벌을 받아왔는지 지은탁에게 고통을 드러낸다.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질렀고 이에 대한 벌로 900년이라는 시간은 충분하다는 도깨비에 말에 지은탁은 도깨비를 위로한다.
“
벌일 리 없어요.
신이 벌로 그런 능력을 줬을 리 없어요.
아저씨가 진짜 나쁜 사람이었다면
도깨비만 존재하게 했을 거에요
도깨비 신부 만나게 해서 그 검을 뽑게 했을 리가 없어요.
”
늘 자신이 받은 벌에 대한 고통만을 생각하고 있던 도깨비에게 지은탁의 말은 큰 위로가 된다.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지켜만 봐야하며 계속 존재성을 유지해야했던, 긴 시간 속의 해결할 수 없는 외로움을 오직 벌로만 생각하고 있던 도깨비에게 벌이 아닌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지은탁이 뜨게 해준 것이다. 정말 벌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다면 능력을 줬을 리 없으며 도깨비 신부를 만나 무의 존재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라는 지은탁의 말은 도깨비에게 희망이라는 존재를 생각하게 해준다.
신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고통을 준다는 말에 자신은 신이 과대평가했다는 생각을 하는 도깨비의 독백은 그에 대한 공감과 지금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되 뇌일 수 있는 생각의 여지를 준다. 우리는 우리가 겪을 수 있을 고통의 크기를 겪고 성장해가는 중일까? 사람들은 시련의 크기가 성장의 크기보다 늘 빠르다고 생각한다. 시련을 겪고 이에 깨달음을 얻고 성장하는 이상적인 모습. 허나 모든 경우가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의 성장 크기가 시련의 크기보다 크다면 우리는 시련을 시련으로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저 뛰어넘은 장애물이라 생각했을 것이고 장애물로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삶에서 성장의 크기보다 큰 시련이 우리를 마주했을 때, 당황하고 이에 대한 도전을 느끼는 것이다.
반대로 신은 인간에게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닐까? 늘 자신의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채 타인의 커다란 행복을 부러워하는 사람들. 일확천금이라는 거대해 보이는 부의 행복을 추구하지만 이러한 사람들의 소원은 아직 그들이 감당하지 못할 행복이기에 이뤄지지 않는 것은 아닐까?(거대해 보이는 행복이 실상 거대한 시련일 지도 모르지만)
혼자 나와 혼자 돌아간다는 생각이 만연한 커다란 세상에서 오롯이 혼자 세상에 맞선다는 생각은 우리를 힘들게 만들 수 있다. (종교적 관점이 아닌)나를 지지해 주는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의 삶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중도를 지켜주는 신이 있다는 것을.
“
사람들은 모를 텐데
세상에서 멀어지고 있을 때, 누군가가 세상 쪽으로 등을 떠밀어준다는 거.
”
이렇게 우리가 모르는 사이, 우리를 지지해주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쁘지 않은 믿음일 것이다. 이에 몰두해 주객이 전도돼지 않고 심리적인 안정을 위한 믿음이라면 우리 삶은 좀 더 포근할 수 있다.
도깨비 신부를 사랑하게 되어버린 도깨비. 사랑이라는 행복이 다가오지만 자신의 행복이 사랑하는 이의 행복이 될 수 없음을 느껴졌을 때,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죽기로 결심하는 도깨비는 아직 도깨비 신부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리라. 그렇기 때문에 검을 잡을 수 없고 사랑하게 되어 검을 잡을 수 있게 된다면 선택이 바뀌진 않을까?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과 사랑하는 이가 나로 인해 불행하게 되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 중 어떤 선택이 바람직한 것인지는 판단할 수 없다. 다만 이로 인해 느낄 감정만 생각할 수 있을 뿐.
“
생이 나에게로 걸어온다
죽음이 나에게로 걸어온다
생으로 사로
너는 지치지도 않고 걸어온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야 마는 것이다
서럽지 않다
이만하면 되었다
된 것이다
하고.
”
담담히 삶의 끝을 받아드리려는 도깨비의 모습에서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 떠올랐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삶에 대한 애착을 덜고 하늘로 돌아가려는 마음의 자세. 서럽지 않고 이만하면 되었다는 만족의 자세는 담담한 마음으로 달관의 경지를 보여주면서도 미세하게 아쉬움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검을 뽑기 전, 내일 검을 뽑자며 하루하루 미루는 도깨비의 모습은 이러한 마음 상태를 잘 보여준다.
“
너와 함께 한 시간 모두 눈부셨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
”
마지막으로 세상에 남기는 말로 도깨비가 선택한 말은 지은탁에 대한 마음을 잘 보여준다. 모든 것이 좋았다. 결국엔 너와 함께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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